한민족의 최대 독립투쟁인 3.1운동, 그 역사에 다가가며 1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 움직임을 시작한 주역은 누구였을까? 민족을 대표하는 33인은 어떻게 만세운동을 준비했을까? 211개군 중 100만 명이 일어나 독립을 외치던 그 횃불 봉기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만으로 가능했을까? 그리고 애국심이 조직적으로 폭발하는 계기는 고종의 일본독살설 때문이었을까?
역사는 명쾌하게 대답한다. "모든 투쟁에는 리더가 필수적이다. 3.1 운동은 이승만이 처음부터 기획하고 이끈 항일투쟁이다. 윌슨의 민족자결론이 발표된 직후, 이승만은 찬스를 잡자고 결심하고 국내 동지들에게 구국운동을 촉구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증거들을 살펴보자." 역사는 이승만의 계획과 행동이 3.1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1954년 인하공과대학 개교식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교기를 전달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승만 교육자는 하와이에서의 활동에 대한 영화 <건국전쟁>에서도 주목받았다. 하와이는 그의 건국을 위한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로서뿐만 아니라 교육입국을 통해 국민을 계몽시키고 무상교육과 대학 설립을 실현한 곳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로버트 올리버 정치고문에게서 "이승만은 교육대통령이다"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교육에 대한 열정을 지녔다. 그는 탁월한 교육정책과 함께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의 전문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조선 말기에는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불안으로 인한 이주민 증가가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관료의 탐욕과 착취로 빈곤한 국가가 되었고, 조선인의 부지런함에도 불구하고 발전 기회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슬라 비숍의 언급에 따르면 조선은 발전 기회가 주어진다면 부지런한 조선인의 성실함으로 높은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되었다.
하와이에서의 교육활동은 이승만의 교육입국 정신을 실천한 결과로 평가받았다. 1913년 이승만 박사가 한인기숙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하와이의 교육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승만 교수는 여성 교육에도 힘을 쏟아 여성 교육을 확대하는 등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하와이 교육법이 개정되어 공립학교 졸업만을 학력으로 인정하게 되면서 어려움에 처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부지조차 대학 설립을 위한 기금으로 활용되는 등 교육에 대한 그의 헌신은 계속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은 본격적인 교육입국 정책을 추진했다. 국가 예산의 10% 이상을 교육에 투자하여 초등학생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성인 대상의 문맹 퇴치운동을 전국적으로 실시하며 문맹률을 현저하게 낮추었다. 고등교육에도 힘을 쏟아 대학 설립을 촉진하고, 과학기술 교육을 중시하여 원자력 기술 도입을 추진했다.
기록된 증언 - 3.1운동의 핵심 인물들
우리는 중요한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더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김성수의 증언에 따르면, 1918년 12월,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밀서를 받아왔다. 그 내용은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을 활용하여 독립을 호소하고 미국 동지들의 지원을 기대하는 것이었다. 김성수와 동지들은 이에 응답하기 위해 천도교를 동원하고자 했다.
또한, 임영신은 1918년에 시작된 독립운동을 위해 힘을 모으고자 했는데, 이승만의 비밀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그는 메시지에 따라 3.1 운동 때 전주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기독교의 역할 - 3.1운동의 선도적 역할
3.1 운동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에서부터 기독교의 영향력이 컸음을 고려해야 한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43명의 동지를 개종시키고, 기독교 교회와 YMCA를 통해 조직을 강화했다. 특히, 이승만과 이상재는 세계 최초의 비폭력 독립투쟁인 '3.1 정신'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세계적 국면 - 3.1운동과 동시에 벌어진 사건들
3.1 운동이 벌어진 1919년, 세계는 큰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권 선언은 다양한 민족운동을 일으켰고, 이와 함께 소련의 코민테른은 공산주의를 전파하려 했다. 이 시기에 시작된 좌우 이념투쟁은 현재의 대한민국 정치와도 연결되어 있다.
3.1운동의 후폭풍 - 이념투쟁과 대한민국의 도전
그 후, 3.1운동을 계기로 한민족은 독립을 향한 투쟁을 지속했다. 그러나 동시에 공산주의의 파급효과도 경험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이러한 상황에서 반공 선언을 했고, 이로 인해 좌우 이념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투쟁은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꾸준히 이어져왔다.
이승만의 메시지와 우리의 도전
대한민국은 오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국제 정세의 변화와 함께 한민족은 다시 한번 국민의 단결을 모색해야 한다. 이승만이 살아 있다면.... 현재의 정치적 상황과 국제적인 위기 속에서 "제2의 3.1 운동"을 일으키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한다.
삼일절, 대한민국 명언
이승만 대통령 -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
(President Syngman Lee, If we scatter we die, if we unite we live.)
유관순-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Yu Gwan-soon A life to sacrifice to the country There is only one thing This is this girl's only sadness.)